* 할로윈 타임어택 글.
* 많이 짧습니다.
* 감사합니다.
존재만으로 선물 같은 사람들이 있었다. 너무 많은 것을 종이 위의 기록으로 내어주고 나서야 알았다. 나는 그들을 생각보다 많이 사랑했다는 것. 시월의 마지막날엔 어김없이 찾아오는 사람. 내게 올(來) 것만 같았던 나의 행복. 영원할 것만 같았던 이름을 가진 사람.
"오랜만이야, 라이. 매년 이맘때마다 너무하는 거 아니야?"
머리카락이 많이 길었다. 중간중간 많이 다듬고, 지난번에 레이지를 일본으로 보내기 전에도 한번 잘라달라고 부탁했었으니. 그대로 쭉 자라도록 두었다면 정말 허리선을 넘기지 않았을까. 그렇게 홀로 잠드는 밤에 익숙해져 갔음에도. 나는 아직 침대 맡에 서있는 라이의 모습엔 적응하지 못한 채 가을을 맞고 만다.
"악령이 나오는 날에 찾아와선 어쩌자는 거야."
바람처럼 와줄 수 있었잖아. 떨어지는 낙엽 한 장에도 라이의 손길이 닿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늘 이렇네. 사랑은 늘 가장 아픈 방식으로 걸음해 폐부를 찌르곤 했다. 그러나 이것도 내가 짊어져야 할 업인가. 내가 이어야 하는 이야기일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면 이소이 라이는, 이소이 사네미츠의 옆에 우두커니 서 있다가도 열리는 현관문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일어나계셨슴까. 일부러 깨우지 않았던 건데요."
"모처럼 이탈리아까지 불러놓고 퍼져 자는 게 어디 있냐고. 망할 민달팽이."
커다란 쇼핑백을 양손에 든 레이지와, 소품이 든 플라스틱 바구니를 든 레이지. 그러고 보면 부엌에선 평소의 계란 냄새 대신 단내가 풍겨왔다.
"이야, 미안미안. 어떻게든 오늘은 쉬고 싶어서 새벽 마감을 달렸더니..."
"아침도 아직이죠? 세오도아 씨랑 츠바이크 씨가 부엌에 있으니까 세수하고 와요. 잠 덜 깬 얼굴이랑은 아무래도 겸상하긴 그러니까."
"그럼, 형이랑 저는 먼저 가있겠슴다."
미안하다는 눈치고 눈썹을 조금 모아 웃어버린다. 레이지랑 하루키, 어느새 저렇게 컸으니까. 아버지인 나도, 제대로 정신 차리지 않으면 안 되려나. 화장실로 향한다. 물을 틀고 두 손을 모아 물을 받았다. 하루키에게 물려준 색채 중, 오른손에 남은 흉터의 색은 없다. 없애려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었을 텐데도. 이러려고 나는 그날 반혼초를 골랐나봐, 하지메. 그리고 우츠기. 물에 젖어버린 머리카락과 얼굴로 거울을 바라본다. 이 세상에서 그날의 너희를 기억하는 것은 오로지 나뿐이라 그럴까. 내가 너의 말대로 신의 사랑을 받든, 혹은... 그에 이르지 못하든. 너에 대한 이야기를 오롯이 재편하고 너의 소망대로 잘 기록했다면. 이것은 기억이란 잉크가 번진 흔적인 걸까. 어쩌면 너무나 아득해져서. 정말 이젠 그날이 나의 것이었나. 내가 지키고 싶었던 것들은 정말 그곳에 존재했었나. 그런 의문이 들 때마다 나는 오른손을 내려다보고 마는 것이었다. 부여된 이유가 아닌 나의 의사로. 오로지 너희들을 추억하려 든다면. 너희는 어떤 표정을 하고 이쪽을 바라봐줄까.
있잖아, 우츠기. 이제와 생각해보면, 내가 기억하는 너의 얼굴은 전부 웃는 것뿐이라. 그렇게 화내고 소리치고 맞부딪혔는데도. 그 순간의 인상이 흐릿해.
거울 속의 두 눈동자는 형형히 붉게 빛나고 있다. 투명하게 세상을 기록하는 이가 필을 잇는 자라면, 어쩌면 나랑은 조금 안 어울리지 않을까.
수건으로 얼굴을 닦고 나와 느리게 걷는다. 아무리 남부 유럽이라도 가을은 가을이니까, 레이지의 방에 가을 이불을 꺼내 줘야 할까. 역시 하루키를 게스트 하우스에 보내는 것보단 자신의 침대를 내어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시답지 않은 생각들로 무거운 고민들을 덮어나갔다. 부엌으로 향하는 문을 연다. 아, 이건 구운 호박의 냄새. 오븐에서 세오도아가 파이 틀을 꺼낸다. 이야, 제일 늦었네? 두 아들의 아버지 씩이나 되어 놓고! 애니와 드레퓌스는 집 단장인가. 그렇게 힘으로 뜯어내면 모양이 남아나질 않겠는데요. 기본적으로 종이 장식이니까요. ...알고 있다니까. 그렇게 잘하면 네가 다 하면 되잖냐. 레이지와 하루키는 소파에 앉아 사탕을 나누고 있다. 해가 지는 저녁만 되어도 이 동네 아이들이 하나 둘 벨을 누르겠지. 사람이고 싶은 것과 사람이었던 것, 사람이 되어가는 것들이 가득한 집에서 받아가는 사탕은 여전히 단 맛일까.
"사네미츠 씨, 좀 도와주십쇼. 아무래도 양 조절을 실패한 것 같슴다."
"그러게 두 봉지쯤 덜 사도 된다니까."
"케케케. 한주먹씩 주는 게 또 할로윈 아님까. 이탈리아~"
"태연하게 이탈리아~가 아니잖아!"
그럼, 이런 손이라도 빌려줘 볼까?
발걸음을 뗀다. 가볍게 환기하듯 눈을 감았다 뜨고 손을 뻗으려고 하면, 무언가가 옷자락을 잡아와서. 돌아볼 수밖엔 없어서.
"미노루 군, 이제 행복해?"
멈춰 설 수 밖엔 없었어. 돌아본 라이의 얼굴의 표정을 읽으려 든다. 푸르게 투명한 형체가,
점, 점.
붉게 물들어가.
그리곤 정적.
이소이 사네미츠만이 홀로 거실에 서 있었다.
하다라 미노루가 그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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