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포신곡 S+ 루트의 연장선
* 이소이 레이지와 이소이 레이지가 만납니다.
* 조금 변형되었지만 https://twitter.com/lostmyneck/status/1450165675687776256 < 이 썰에서 시작되었습니다.
* 캐해석이 애매할 수 있습니다.
* 이소이 가족을 사랑하는 가족에게 선물하는 첫 연성
기차가 들어온다. 햇살은 비스듬히 역사를 비추고 적당히 선선한 바람이 부는. 그런 날. 키가 작은 자신보다도 한참 작은 어린아이의 눈이 말갛게 이쪽을 보고 있었다.
“그러니까, 여행을 가잔 말씀인 검까.”
“응! 기차, 도착했으니까!”
“짐은 그게 담까? 더 들어줄 건 없나요?”
“이걸로 충분해! 그러니까 우리. 하루 형아한테 가는 거야?”
“그렇지 않을까요. 아마도 오래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름다.”
아토 하루키, 그러니까. 의형에 대한 평가는 변함없었다. 전부를 챙길 것처럼 떵떵거리고 비실비실한 팔다리를 움직여 힘껏 발버둥 치는... 어중간하게 똑똑하고 죽을 만큼 완고해서 어떤 설득도 먹히지 않는 사람. 그러나 무력으론 굴복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 그런 사람을 구하러 갔었던 기억이 난다.
작은 손이 건네는 물건을 받아 든다. 애벌레 모양을 본뜬 인형. 손에 쥐었다간 온갖 색채로 물들어버릴 것 같은 크레용. 그리고, 마지막은 저 작은 몸이 소중히 껴안은 스케치북. 단출하고 꽤나 귀여운 물건들이다. 그러고 보면, 사네미츠 씨가 언젠가 사들고 왔던 것을 닮은 것도 같은 기분. 무얼 그렸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그렇지만 어쩐지 이 역사만큼이나 따뜻한 느낌이 들어서.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는 자신이다.
조금은 차가운 체온이 와닿았다. 인형을 쥔 손에 닿은 다섯 가닥의 체온. 그래. 오래전에 잃었던 아들이다. 조금은 딱딱하게 굳은 안면근육을 움직였다. 그러니까 지어주고 싶었던 얼굴이 있었는데. 약하게 팔자로 기울어지는 눈썹. 그를 따라 누그러지는 눈매. 적당히 풀어진 미소가 떠오르면 말을 건네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주 오래 곱씹은 문장이니까. 그걸 위해 살아온 날들이 있었다. 몸을 낮추고 아이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아름답고 자애로운 이소이 레이지. 같이 여행해주시겠습니까.”
“내 이름을 알고 있어? 하루 형아가 알려준 거야?”
“제 이름도 레이지거든요. 우리, 꽤 재미있는 여행 파트너가 될 거 같지 않나요?”
“좋아! 그럼, 잘부탁해! 레이지 형아!”
투박한 손으로 아이의 손을 잡았다. 너무나 많은 것을 알지 못한 채. 그러나 너무나 많은 것을 알아버려서. 사네미츠 씨를, 그리고 하루키 씨... ...이제 와서 상관없으려나... 하루키 형을. 떠나야 했던. 그런 하얀 손. 조금은 차갑지만 그 박동만큼은 어린 새를 닮아 있는 포근함.
“그거 알고 있나요? 레이지 군은, 어쩌면 제 형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거 말이에요.”
“레이 군으로 괜찮아!”
출발하는 열차. 파란 하늘이 펼쳐지고, 그래. 어쩌면 유원지에 가기 딱 좋을 것만 같은 날씨. 온통 노란빛으로 가득 찬 것 같은 차량 칸 안에서, 작은 발이 신이 난 듯 흔들렸다. 정말 그렇게 불러도 좋냐는 물음에 작은 머리통이 열심히 긍정을 표한다.
어쩌지.
자신은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두기만을 반복할 수 밖엔 없어서.
조금은 곤란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그래. 이게 꿈이라면, 사네미츠 씨가 여기에 있었으면 좋았을까. 아니면 적어도 그의 아들이 이 자리에 있었어야 할까. 오롯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저 눈빛이 누구의 손에서 싹튼 것인지를 알고 있는 이상, 자신은 저 감정에 오롯이 답할 수는 없겠지. 어쩌면 뼈저리게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그렇지 않았다면, 일본으로 오기 전에 아버지.라고. 한 번쯤. 말을 건네고 왔을 테니.
“그럼 레이 군. 가는 길엔 뭘 하고 싶슴까. 좋아하는 놀이가 있나요?”
“음... 글쎄... 아빠가 여기 있었다면...”
이내 고심하는 표정을 짓던 아이는 목소리를 조금 낮게 하곤,
“으음~ 레이지. 역시 이럴 땐 파파가 좋은 놀이를 생각해볼까! 해줬을 텐데... 히이...”
하곤. 저보다 훨씬 어른인 그를 따라 해 보이는 것이었다. 새어 나오는 것은 웃음이려나.
“그러네요. 사네... ... 레이 군의 파파는, 다정한 사람이었군요.”
폴짝 자리에서 뛰어내린 아이가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레이 군, 레이 군은 많이 닮았네요.”
“응? 누굴?”
“그 사람이 아주 오래 사랑하고 있는 사람을 말이에요.”
기억을 되짚자면 아주 오래된 이야기. 그러니까, 그래. 절대 무턱대고 는 아니겠지만 어쨌든 연고라곤 없는 이탈리아로 향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했던 날.
시작은 쉬웠다. 아마 첫 단어는 Alfabeto.
"레이지. 볼래? 이건, 내가 네가 가르쳐주는 첫 번째 글자야.“
그리고, 네가 살아가게 되는 나날을 지탱해줄 문자이기도 해.
기억 속의 사네미츠 씨는 확실히 지금보다 어렸다. 어리다, 라는 단어가 적합할지 어떨지. 평생을 글을 쓰며 살아온 그 사람에겐 조금 버석거리는 표현일지 모르겠으나, 다르게 말하자면 젊다. 서툴다. 그리고 조금은 불안하다.라는. 단어가 사용될지도 모르겠다.
알파베토.
알파벳.
그가 나에게 가르쳐주는 모든 것들이 여과되어 닿는 수단. 읽기에 조금 서툴렀을 때, 사네미츠 씨는 종종 이탈리아어로 일기를 쓰곤 했지. 그래서 알고 있어. 수많은 문장들과 단어들 사이에, 유일하게 모국어로 적혔던 이름이 있었다는 걸. 그 사람을 차마 타국의 언어로 변형시켜 적을 수 없어서 아주 먼 모국의 말로 적어두었다는 걸.
라이, 나는 아직도 변함없이,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
손가락으로 짚어본 문장의 온도는 눈물보다 뜨거운 감촉이라. 그대로 일기장을 덮고 방을 빠져나왔던 기억이 선연히 차창에 스쳐 지나갔다.
생각을 물린 건, 아주 달콤한 냄새였다. 단 걸 그렇게 찾아 먹는 사람은 아닌데. 어쩐지 코를 찌르는 단내는 기분 나쁘지 않았다. 이탈리아도 그랬지만, 일본 공항에서부터 깔려있던 스위츠들을 수없이 지나쳐 왔던 건 누구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간이 테이블 위를 장식한 작은 접시들. 한 번만 잘못 만져도 바스러질 것 같은 설탕과자. 노릇한 쿠키. 마주 본 흰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사네미츠 씨. 동그랗게 웃는다는 말 말이에요. 지난번에 잡지에서 읽었을 땐 아주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이런 걸 가리키는 말이었던 것 같슴다. 작은 두 손에 네모난 쿠키를 쥔 아이가 이쪽으로 한 손을 내밀었다.
“그거, 저 주는 검까. 다 먹어도 괜찮은데요.”
“응? 레이 형아는 단 거 싫어해?”
확실히, 단내는 좋아하지 않는데.
“그게 뭐예요. 이름이 같아서야, 레이 군이 레이 군을 부르는 것 같잖슴까.”
이런 것보단, 담배의 먹먹함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레이지, 싫지 않다면, 한 번 손 내밀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단다.
“그럼, 감사히 먹도록 할까요. 고맙슴다. 레이 군.”
아, 세오 씨. 당신이 말했던 세상이란 거. 담배가 생각나는 따뜻함이란 건. 이런 순간들이었나 봐요.
바삭. 부서지는 쿠키. 입 안으로 밀려오는 적당한 초콜릿의 맛. 술 대신 따른 흰 우유.
어라. 그러고 보면, 입고 있던 옷이 조금 커진 것 같은 건. 기분 탓이 아닌지도 모르겠어.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가진 채 얼굴을 마주 보면, 입술에 부스러기를 묻힌 채 응? 하고 내밀어진 물음이 있었다. 동그랗기만 하던 눈매가 조금씩 영글고 하늘색 반팔 티셔츠가 소매가 긴 후드티로 바뀌어 있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이건, ...”
“조금 자랐어. 여행은 그런 거니까.”
“이미 다 자란 거 아니었슴까. 이미 저보다 형인데도.”
과자 부스러기가 묻은 손을 크레용을 잡았다. 펼쳐진 스케치북은 너무 넓어서, 무엇으로 가득 채워야 할지 잘 모르겠어. 어느새 열차 바닥에 배를 깔고 누워 마주 보는 하얀 도화지가 시리게 다가왔다. 어릴 땐 종종 그림을 그리기도 했었던 것 같은데. 첫사랑을 알기도 전의 일이다. 까만 크레용을 잡은 손이 검게 물들어갔다. 그러고 보니 그곳에서 자주 봤던 색이야.
몇 번이고 피가 터지고 뼈가 으스러져 재생을 반복할 때, 혹시나 나를 이루는 것들 중 일부가 이런 색은 아닐까 겁을 냈던.
어쩌면 죽기보다도 좀 더 무서웠던 색.
검게 안에서부터 찢겨나가면 하루키 씨도 시나노 씨도,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알아볼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
-아들들아- 라고 적힌 편지가 담은 소망을 조각조각 내버리는 것.
그렇지만 자신이 지금 손에 쥐고 있는 것.
“레이지, 쉽지 않아?”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에 내려앉는다. 기분 좋은 바람을 닮은 목소리. 한 줄기의 청명한 감각. 고개를 들면, 마주칠 수 있는 까만 눈. 자신을 꿰뚫어 보는 차분한 눈. 열차의 창문이 조금 열려 있는지 하늘거리는 머리카락이.
그리고.
그리고 자신의 머리 위에 뻗어진 다정한 손길이.
두 눈이 크게 열리고, 심장에서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자신이 이어받은 이름은 이런 사람이었구나.
“어려우면, 사랑하는 것들을 그려볼까?”
검정 크레용은 어느새 손아귀에 들려있지 않다. 움켜쥐었던 공동(空洞)의 색 대신, 샛노란 공동(公同)의 빛깔. 노란 크레파스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려내는 것은 얼굴들. 두건을 두른 여자. 봉골레 파스타를 잘하는 남자. 애플파이를 잘 굽는 사람. 그리고 아주 많이, 밝게 빛나는 이름을 가진 사람. 많은 사랑을 홀로 끌어안고 늘 웃어주던 얼굴. 삐뚤빼뚤하고 엉망인 선들은 점점 작아진 손이 너무 물러진 탓일까. 아니면. 아니면...
지키고 싶었던 것들을 비로소 떠올려버렸기 때문일까.
민들레를 닮은 머리색을 가진 마른 남자를 여백을 채워 넣는다. 하루키 씨. 나의 의형. 하루키 형.
돌고 돌아 내가 구해낸,
그리고 나를 구해준.
나의 가족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나요. 당신.
정말 이 여행의 끝엔 당신이 있나요.
당신이 아팠던 시간은, 내가 당신을 살려냄으로 구원받았나요.
아랫입술을 깨문다. 내 손은 이제, 그 연구소에서 처음 구조당했을 때의 크기가 되어버려서. 치렁치렁해진 옷자락에 고개를 묻었다.
“여기. 하나 빠진 게 있는데?”
스케치북이 조금 움직였다. 보지 않아도 알고 있어. 거긴 내 자리가 아니에요. 그러니까 진짜 레이지가 들어가면 돼. 욕심내면 안 되는 거였는데. 형이라던가, 아버지라던가. 스승님이라던가 동료라던가. 사실 전부 당신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레이지 군. ...레이지.”
채근하는 다정함에 고개를 들면, 그 한가운데에 서 있는 자신. 올리브 색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이 그려져 있었다.
이소이 레이지는 웃었다. 연두색 애벌레 인형을 안겨주며 이건 형이 가지고 놀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 어떤 물건보다도 이소이 하루키의. 그러니까. 두 사람의 형의 냄새가 나는 물건이라고 말했다.
작고 포근한 냄새. 웃자란 민들레와 같은 옅은 풋내음. 그날의 일기장에서 맡았던 적포도의 떫은 맛을 형용한 냄새.
레이지.
내가 돌아갈 수 있는,
단 하나의 희극을 집필한, 잉크의 향.
“그러니까, 괜찮아.”
눈을 깜박이면 들이치는 이 빛이.
“조금 더 행복하다가 와주면 안 될까?”
귓가에 웅웅 거리는 이 목소리가.
“레이 군! 기다리는 건, 잘 하니까!”
손을 뻗는다. 더 이상 나는 타인의 어중간한 감정을 흉내 내지 않아서. 조금은 투박하고, 다소 거친 손이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다시금 작아진 당신은 여전히 따뜻하게 웃고 있어서. 나는 될 수 있는 한, 가장 책임질 수 있는 문장을 내뱉기로 한다.
“다녀와서 들려줄 멋진 이야기를 잔뜩 준비해야겠네요. 아주 오래 기다리게 돼도 모름다.”
“응! 알고 있어.”
“같이 있어주지 않아도 괜찮겠슴까.”
“그럼! 레이 군은 기차 좋아해. 언젠가는 닿게 되어있으니까.”
“언젠가 또요?”
“언젠가 또.”
“약속처럼?”
“약속처럼!”
좋아요. 나는 이렇게 다시 한 번 당신의 이름으로 호흡을 함다. 어쩌면 과분한 사랑일지도 모르겠어요. 다녀와서는, 제대로 어른처럼 굴 테니까.
한 번만 더.
가족에게로 다녀오도록 할까요.
클램프를 타고 방울방울 떨어지는 건, 연명의 약물. 시야가 밝아온다.
“망할 민달팽이! 레이지 자고 있는 거 안 보여요? 의사가 아무 이상 없다잖아!”
“하, 하루키... ......미안. 그렇지만 걱정이 되는 건...”
“좀 기다려 봐요. ... 당신 아들이잖아.”
sciocco... 바보같아...
“어? 레이지! 일어난 거야? 나 알아보겠어?”
“레이지 씨이!”
급하게 다가오는 발소리들.
“지금 누가 누굴 걱정하는 검까... 잠깐 밀린 잠을 잤을 뿐이에요... 아픈 곳도 없슴다.”
“아니 아니, 그래도 역시 의사를 부르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렇지만 레이지 씨 제일 부상이 심하기도 했고...”
“그보다 이쪽에서 하고 싶은 말, 하게 해주지 않겠슴까. 오래 참았는데.”
“할 수 없네. 심각한 일은 아닌 거지? 그래. 어쨌든 무사히 일어났으니까. 어디, 들어볼까."
이번에야 말로 제대로예요.
이것만은, 두 사람의 몫을 담아.
“다녀왔슴다. 아버지. 그리고, ... 형.”
END? 다시 한번, 가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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